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홍산대첩]], [[최영]]의 승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홍산대첩)] || [[파일:external/www.han-style.com/pic_choiyoung_01.jpg|width=150]][br]'''[[최영]](崔瑩)''' || 고려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왜구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한 최영은 자신이 나서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우왕에게 허락을 구했다. >"보잘것없는 왜구들이 이처럼 방자하고 난폭하니,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꼭 이길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며, 군사들도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지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 >'''《고려사》 최영전''' 당초에 우왕은 최영이 연로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당시 최영의 나이는 옛날에는 곧 죽을 나이라던 환갑이었다(...).] 최영이 계속해서 출병을 요구하자 결국 승낙했고, 최영은 그 즉시 잠도 자지 않고 출병했다. 당시 왜구의 기세가 대단히 흉흉하여 "왜구가 곧 도성에 오려고 한다." 는 출처 불명의 헛소문까지 퍼져 개경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조정에서도 군사를 풀어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왜구가 송악산으로 온다는 소문에 송악산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대비하기까지 했다. [[파일:dTDGOOn.jpg|width=300&align=left]]이제 홍산(鴻山)[* 충청남도 부여군]에 이른 왜구는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는데, 양광도 도순무사 최공철과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도착하자 왜구는 험한 요지에 자리 잡고 있고, 삼면이 모두 절벽에 길이라고는 한 길뿐이라 그 길로 진군하는 것은 [[어그로]] 맞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에 최영이 직접 사졸들의 선봉에 서서 정예병을 이끌고 앞장서 돌격을 하자, 적들이 바람 앞의 풀처럼 쓰러졌다.'''[* 원문 그대로의 표현(披靡)이다.] 이렇게 앞장서서 돌격하다보니 당연히 최영 본인도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풀 속에 숨어 있던 왜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자 '''최영은 입술을 맞았다.''' 그런데 이후 '''태연하게 적을 쏘아 넘어뜨린 다음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아버렸다.''' 최영은 피를 흘리면서도 더욱 분발해 싸워 적을 완전히 무찔렀다. 이후 최영이 판사(判事)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이를 보고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소식을 전한 박승길에게도 백금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 등을 보내 최영에게 재물을 주고는 의원 [[어백평]](魚伯評) 등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최영을 치료하게 했다. 이후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를 맞이했는데, '''마치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듯했다고 한다.''' 이 홍산대첩의 정확한 전과는 애매한데, 우왕은 술을 따라주면서 최영에게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고 물었지만 최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이에 재상들이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최영은 또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적이 많았다면 이 늙은이가 살아 올 수 있었겠느냐." 고 대답했다.[* 최영의 겸손이었을 수도 있지만, 홍산대첩이 벌어진 장소를 답사한 이영 교수 등은 지형적인 여건을 볼때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지형이라고 주장했다.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